[인터뷰] 작가가 만난 작가,“코로나 시대에도 ‘공명(共鳴)하는 마음들이 있다” 오태호,『공명(共鳴)하는 마음들』
[인터뷰] 작가가 만난 작가,“코로나 시대에도 ‘공명(共鳴)하는 마음들이 있다” 오태호,『공명(共鳴)하는 마음들』
  • 황정미 인재기자
  • 승인 2021.01.11 12:5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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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이 넘어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태도,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임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업코리아=황정미 인재기자] 


평론집(評論集)인데,
괜찮겠어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오태호 교수의
전심(全心)을 보다.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문학 평론집(評論集)을 인터뷰 한다고 했을 때 오 태호 교수는 궁금해 했다. 어쩌면, 문학을 평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는 작업의 결과물인 평론을 쓴 오태호 교수에게 [작가가 만난 작가]라는 네이밍은 낯설 수 있다. 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 기자이면서 작가이고, 평론집을 출간한 사람이 책 한권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공명하는 마음을 풀어 헤치고 그 마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수많은 Tag와, Naming으로 친절한 해석을 덧붙이니 창조자, 작가임에 틀림 없다는 결론을 냈다. 오태호 그는, 교수이면서 작가이고, 작가이면서 사람이다. 너무 진솔해서 마음을 다 들키는 아이같은 사람이다.


"오태호 교수는 1970년 서울 출생으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부터 경희대에 출강했으며,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 평론 (「불연속적 서사, 중첩의 울림」)으로 등단했다. 2004년 『황석영 소설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2년 ’젊은 평론가 상’을 수상했다. 평론집으로 『오래된 서사』,『여백의 시학』,『환상통을 앓다』,『허공의 지도』 등이 있다. 편저로 『동백꽃』,『황석영』,『이선희 소설 선집』,『개마고원』,『오영수 작품집』,『조용한 작품집』,『구상 시선』,『김기진 평론 선집』,『한효 평론 선집』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 『문학으로 읽는 북한』을 상재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작가가 만난 작가]라는 콘셉트로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을 때, 평론집인데 괜찮겠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후 교수님이 쓰신 『공명(共鳴)하는 마음들』을 다 읽어보고 인터뷰 여부를 결정하자고 하셨을 때 전화로 나누었던 진중함의 이유를 책을 다 읽고 알았습니다. 사소한 그리움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내는 사람과 서사와 서정을 애인 삼아, 함께 공명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오래도록 인연을 맺고 싶다는 [필자의 말]을 읽고 알았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인연이 되어서 인터뷰로 공명하는 마음을 나누게 되니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교수님이 사유했던 찰나의 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Q. 2016년 <<허공의 지도>> 출간 이후, 4년만에 출간하는 다섯 번 째 평론집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공명하는 마음들>>이 어떻게 다가가기를 바라셨는지요?

: 평론집이 대중 독자들에게 읽히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2012~19년 사이 8년 동안 써낸 소설 평론들을 살펴보니,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는 마음들의 무늬가 많이 보였습니다. 2010년대 문학이 개별과 보편으로서의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죠. 2020년에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이 ‘서삼독(書三讀)’입니다. 독서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텍스트의 저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다는 의미인데요. 제가 쓴 평론들도 평론의 대상이 된 텍스트와 함께 텍스트의 저자와 필자의 문제의식이 파동을 일으켜 또 다른 독자들에게 공명되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Q.코로나로 인해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시대, 문학은 ‘잠수함 토끼’처럼 시대적 전조를 예견한다고 쓰셨습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류가 언급한 ‘산소 부족’을 알려주는 토끼의 역할이 문학이라고 단언하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 문학은 사후적 애도의 장르이자, 사전적 징후의 텍스트입니다. 그러므로 ‘잠수함 토끼’는 비유이자 현실입니다. 글자 그대로 타인과 세계를 관찰하면서 현실의 부조리를 가장 먼저 아파하고 그 통증에 함께 동참하여 고통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문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현실을 새로이 가공하면서 세계와 자신이 앓고 있는 통증의 내력을 주변에 알리는 존재가 문인이라는 점에 착목했습니다. 문학적 순수성을 환기한다기보다는 혼탁한 시대의 공기를 먼저 호흡하며 사후적으로 오래도록 앓는 존재라는 점에서 ‘잠수함 토끼’의 비유를 활용했습니다.

 

Q.지금부터는 책의 구조와 상관없이 질문하겠습니다. [작가가 만난 작가] 콘셉트로 교수님을 인터뷰하겠다고 말씀드렸던 이유는, 최은영의 첫 소설집<<쇼코의 미소>> 평론을 읽으면서 어쩌면 첫 소설을 써 놓고 출간조차 못하고 있는 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쇼코의 미소>>에 등장하는 화자는 아카데미를 마치고 단편영화 독립영화제에 작품을 냈지만 낙방을 하고 30세를 목전에 둔 나이에 창작이 자유와 해방의 도구가 될 것임을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 반대라고 했죠. 나이 50이 넘어 에세이를 내고, 나름 영감을 얻어 기쁜 마음에 두 달만에 소설을 쓴 저는 화자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제 소설이 현실세계의 한계를 부수고 그림자 가득한 트라우마를 부서줄 것이라고 자부했기 때문이죠. 남편과 이혼을 하고 남자를 그리워하는 제게 화자가 가졌던 ‘괴물 같은 자의식’이 있는지 숙고했습니다. <<쇼코의 미소>>는 우울증을 강조하는 시대에 다양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묘파했다고 보시는지요?

: 네, 맞습니다. 평론집 속 내용으로 답변을 드리자면, “최은영의 소설은 낮은 목소리로 타인의 서사를 조용히 읊조리듯 독자에게 다가온다. 우울증의 색깔이 침잠된 잿빛에 가깝기 때문에 결코 경쾌하거나 가볍지 않다. 무겁게 가라앉은 존재들의 서사는 이 세계가 통증들의 천국이자 외로운 자들의 지옥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천국 같은 지옥에서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공감과 공명만이 이 세계를 더 잘 견뎌내는 방법이라며 위무의 서사를 건넨다.”입니다.

 

Q. 위로가 됩니다. 책의 구조를 보면 1부 ‘서사의 가치’에서는 주제론적인 성격의 비평문을 탑재했던데, 교수님이 기존에 썼던 평론 중에서 고른 것인지요?

: 네, 맞습니다. 2012년 출간된 환상통을 앓다(소설평론집) 이후 2019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 게재됐던 원고들을 모아 출간한 소설 평론집이 공명하는 마음들입니다.

 

Q. 개인적으로 알코올이 일상의 배경으로 활용되면서 우연적 필연을 강조하는 작품 중에 지독한 불행의 결말을 내장한 <<실내화 한 켤레>>작품에 눈길이 갔습니다.

제가 에니어그램 상담사 일을 하고 있고, 제 유형 에니어그램 7번이 알코올 중독성이 강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는’ 혜련과 선미는 에니어그램 장형이며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경안의 유형은 에니어그램 머리형입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불행의 견지를 네가지 표정으로 정리해주셔서 호기심이 간 작품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실내화 한 켤레>>를 통해 바라본 교수님의 불행관은 어떤지요?

: 불행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가느냐가 관건일 텐데요. ‘불행관’이 따로 있지는 않구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진 문구)”는 경구가 불행의 파고를 견디는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Q. 갑자기 궁금한데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원시(遠視)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가까이 있는 물체를 잘 볼 수 없는 시력인데요. 작품 주인공 경안이는 원시로 불행을 본다는 것인지, 아니면 글자의 해석을 넘어 불행을 외면하려고 시선을 멀리 거두는 것인지..?

: 작품 속 인물과 실제의 사람을 분류할 때는 다르게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불행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이는 여고 동창생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원시를 가진 사람은 멀리 있는 대상의 경우 잘 볼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대상은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근시적 시각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고, 근시 자체를 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근시적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실제의 현실에서도 단편적인 시각에서 누구는 원시, 누구는 근시, 누구는 난시로 유형화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작품 안에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입장을 전형화해서 형상화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Q.그렇다면 필자의 직업과 연관지어 다시 여쭈어본다면, 머리형으로 유추되는 불행을 원시적으로 보는 주인공처럼 교수님도 불행을 원시적으로 보려고 할때가 있는지요?

:음.. 불행이 스쳐 지나가기를 바랄 때도 있고, 제가 극복해서 부딪혀 싸울 때도 있고, 불행의 파고를 마주할 때 ‘단순한 시련에 불과하다’라는 정도로 넘어서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의 파고 안에서 좌초되기도 하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세 인물 모두 ‘원시적인 태도’를 중심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반면에 모두 ‘근시적인 인간’이나 ‘난시적인 입장’에서 성격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유형으로만 단언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Q,교수님의 평론집을 읽고 교수님이 쓰신 <<허공의 지도>>까지 읽어봤습니다. 교수님은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서 주인공 내면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과정을 타나토스적 표정이라고 쓰시고, <<오직 두 사람>>의 화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갇힌 미숙아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고 언급하시면서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나르키소라고 칭했습니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활자의 정확도에 감탄하면서 읽은 저는... 교수님을 에니어그램 5번으로 유추해봤습니다. 인물을 탐구하면서 책을 읽을 때, 몰입감이 다르기 때문이죠.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머리형으로, ‘지적인 욕구가 자신의 안으로 향한다. 지식을 축적하여 외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지식의 축적이 인생의 목적이며 삶의 의미인 사람. 자신의 공간에 틀어박혀 지식을 끊임없이 축적하는 안경잡이가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지식을 축적하는 욕구의 연장선상에서 수집욕도 강하며 분류하고 항목마다 태그를 다는 일들을 즐긴다.’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비슷한지요..?(웃음)

: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저는 일종의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입니다. 모든 규정에 저항하는 편이어서요. 누군가 저를 진보라고 한다면, 저는 보수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구요. 누군가 저에게 지적이라고 한다면, 저는 충동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떤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서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고 싶습니다.

 

Q.교수님이 달았던 태그 중에, ‘디스토피아적 통일 미래상’ <<강제퇴거명령서-2039년 평성>>이라는 작품이 있던데요. 가까운 미래를 현재화하여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선취하려는 서사적 욕망을 보여준다고 표현하셨는데, 유토피아적 미래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적 암울함으로 작품을 정의하신 근거를 요약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 그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해 말하면서 통일 이후의 낭만적 미래가 아니라 암울한 사회상을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평론집 내용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강제퇴거명령서-2039년 평성」은 미래소설이나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듯이, 자동화된 미래사회의 통일된 한반도에서 벌어짐직한 토지 소유 문제를 천착한 세태풍자소설이다. 로봇과 인간, 시스템과 개인, 남과 북,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등의 문제가 충돌하는 미래 통일 사회의 음화를 추적함으로써 유토피아적 미래상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통일시대라는 근미래사회에 착목하여 시스템과 로봇 만능주의 시대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가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전체주의적 감시체계로 인해 예속화된 인간의 묵시록적 미래가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입니다.

 

Q. 디스토피아를 역(逆)유토피아라고도 한다는 것이죠?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L.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G.오웰의 《1984년》 등이 떠오르는데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강제퇴거명령서>>에도 우리가 각성해야 할 지적점이 있는지요?

: 비대면 자동화 행정 처리가 지닌 비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비판도 드러납니다. 결과적으로 평론집 내용을 가져와서 말씀드리자면 “‘공화국 군인’인 화자는 새로운 통일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미숙아처럼 여겨진다. 결국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모든 것이 통제된 시스템 사회 속에서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는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인간과 인간이 대면 접촉하는 인간적인 만남을 거부함으로써 대면 접촉이 가능했던 사회에 대한 그리움을 역설하게 된다. 화자는 스크린 속 시장을 시스템과 인공지능의 도시를 장악한 소유주로 착각하지만, 결과적으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는 인간에 의해 실현된 전체주의적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입니다.

 

Q.수많은 작품을 조곤조곤, 저작저작, 서사와 서정을 담아 평가한 평론집을 짧은 시간, 인터뷰하는 것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울한 시대를 살고있는 작가이면서 상담사인 제가 궁금한 것을 최대한 여쭈어보면서 독자의 마음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상담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요?” 라는 내담자의 물음입니다. 사실, 저를 찾아오는 내담자들은 치료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해와 공감으로 포용하고 들어주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이번 평론집 제목<<공명하는 마음들>>은 평론집이기 전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총 4부로 나누어 작품을 해제하시면서 제목을 <<공명하는 마음들>>이라고 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너무 늦게 물어봤나요?(웃음)

: 평론집 제목이 3부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원래 가제는 ‘사랑과 상실, 통증과 치유’였습니다. 3차 교정까지 전체 내용을 반복적으로 검토하면서 문학이 상처 받은 자들을 위무하기 위한 텍스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3부에서 살펴본 주요 작품들, 즉 “‘상실의 마음과 공감의 상상력’으로 생의 동력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 ‘폭력의 대물림’ 속에서 해체된 가정의 연원을 찾아가는 정용준의 단편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벌거벗은 투명인간’을 강제하는 시대의 모순을 풍자한 성석제의 『투명인간』, 폐허와 죽음의 현장에서 노동과 생명의 가능성을 의미화한 이인휘의 단편집 『폐허를 보다』, 21세기적 관점에서 ‘20세기의 여명(黎明)’과도 같은 19세기말의 동학을 주목한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 우울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태도를 묘파한 최은영의 단편집 『쇼코의 미소』 등”이 평론집 제목을 착상하는 데에 대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Q.교수님과 이야기하다보니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최광의 소설 <<노크>>에서 조용히 남쪽을 넘어 온 인민군 병사에게 ‘예의 바른 귀순’을, <<쇼코의 미소>>에서는 점잖은 웃음을 ‘예의 바른 웃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단순히, 격식과 예절을 갖춘 자에게 주어지는 ‘예의 바르다’는 아닌 것 같아서요. 특히 <<쇼코의 미소>>가 ‘예의 바른 웃음’과 ‘우울증 걸린 미소’를 거쳐 ‘통증을 함께 앓는 미소’로 수렴된다니, 교수님이 정의하신 ‘예의’가 궁금합니다.

: 예의는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을 말하지만 두 작품에서의 ‘예의 바른’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최광의 소설에서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풍자하기 위한 비판적 요소로 활용된 표현이구요. 최은영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함의를 지닌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쇼코의 미소」는 ‘예의 바른 웃음’이라는 점잖음 속에 감추어진 우울증의 내면화를 조망합니다. 처음에는 포즈적 웃음이나 차가운 미소로 진심을 감춘 듯 위장형 미소를 띄우지만, 일본에서의 우울증 걸린 미소를 거쳐 한국에서 만난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미소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애도를 내포한 위무의 미소가 되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쇼코의 미소’는 처음에는 이중적인 제스처로 기능하지만, 점차 이심전심이라는 염화미소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미소가 서로의 상처를 깊이 이해하면서 점차적으로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Q. 교수님과 견주어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30년이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던 공동체 선생님으로서 지금도 제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청년들은 제가 운영하고 있는 상담실을 찾을 때, 취업을 향한 간절함이 슬픔과 허기로 전이되어 아주 우울한 얼굴과 위축된 몸으로 들어옵니다.

얼굴만 봐도, 조해진 작가의 <<산책자의 행복>>을 평론하신 글귀처럼 그들이 빠져있는 통증에 공감하게 됩니다. 교수님은 그것을 파토스적 공감이라고 하셨는데요. ‘파토스적’ 공감이란 정확히 어떤 것인지요?

: 파토스는 영어로는 ‘페이소스’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애(悲哀)’일 텐데, 타인의 슬픔에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파토스적 공감’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에 깊게 각인된 감수성이라는 생각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조해진은 타자를 지향하는 작가다. 타인들의 삶이 지닌 간단치 않은 질곡을 섬세한 감각으로 포착하고 그 구체적이고 생생한 의미를 밀도 높은 문장에 녹여 내고 있기 때문이다. 초국경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유목민들의 서사를 추적하는 작가의 글쓰기는 그 저변에 파토스적 슬픔을 내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장된 슬픔과 허기들은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변주되어 독자를 향해 건네진다. 그리하여 조해진의 독자들은 타인이 곧 자신이며 타자가 곧 주체의 다른 표상임을 확인하면서 삶의 위안을 받게 된다.”

 

Q. 그렇군요...<<산책자의 행복>>에서 <메이린의 이메일 2>을 보면 ‘존재했던 것의 부재’에 대한 단상이 그려지는데요, 교수님께서 존재했던 것의 부재를 떠올리는 과정의 괴로움은 살아남은 자의 일종의 ‘책무’라고 하셨는데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미치도록 살고 싶음’에도 ‘죽음 충동’이 늘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의무 이상으로 감당해야 할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가 무엇일까요...?

: ‘책무’란 책임과 의무일 텐데요.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먼저 떠난 이들의 부재를 견뎌내며 그들의 긍정성을 기억하고 그들의 몫까지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메이린은 친구 이선의 자살에 대한 사후적 죄책감 속에 미영 역시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미영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미영은 어떤 삶의 답장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미영의 삶의 전망은 무엇인가. 어떻게 삶을 견뎌내고 죽음을 유예할 것인가. 악의적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는가. 삶은 고귀한 것인가.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진행되면서 독자는 인간다운 생존과 품위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타자에 대한 관심과 공감의 회복이 사회의 온기를 높일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자명해진다.

메이린이 경험하는 생존자의 산책은 행복하지 않다. 타자의 고통과 자신의 죄책감을 함께 견디며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산책자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에 눈감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상상력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다. 메이린에게 미영과의 산책이 삶의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책자 메이린과 미영을 둘러싼 타인들의 삶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 주변에 부재하는 존재들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과정으로서의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고행의 생을 견뎌가는 고통스런 수용이 행복인 것인가. 우리는 홀로 혹은 같이 산책하며 질문한다. 우리의 삶은 안전한지, 행복한지, 안녕한지, 그리고 괜찮은 것인지를. 그리고 대답한다. 산책자의 행복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는 동력을 확보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이제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우리 모두 산책자의 타전에 응답할 때이다.”

 

Q. 마지막으로 작가 황 정미를 사랑하는 독자와, 앞으로 오태호 교수님의 문학평을 읽을 독자들에게 흔하게 접하지 못했던 보석 같은 책, <<공명하는 마음들>> 평론집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딱딱하고 어려운 책이 아니라, 문학의 향연에 쉽게 접근하고 따뜻하게 오래 손 잡아 줄 책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교수님께 <<공명하는 마음들>>평론집은 어떤 책인가요? 인터뷰 기사를 읽고 평론집을 구입할 공명의 대상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는지요?

: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복판에 평론집을 출간하면서 제가 읽고 쓴 소설 평론들을 통해 저의 지난 8년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대를 살아낸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생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작가들의 노력을 함께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텍스트와 저자와 평론가의 마음에서 길어낸 글들 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에라도 공명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 글을 읽고 원전을 읽고 싶은 욕심이 들도록 안내하는 길잡이로서의 안내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웃음)

 

 

[후기]호기심을 더하다.

실제, 인터뷰를 진행할 때는 추가적인 질문을 많이 드렸습니다. 이곳에 다 옮기지 못하는 마음을 후기로 전합니다.

마치 평론집이 한폭의 유화를 진하게 그려낸, 곰탕처럼 진한 국물 맛이 나는 책이라서 책 한 쪽이 눈물에 젖을 만큼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를 사물화, 타자화]로 그려 낸 [세실, 주희] 평가라든지. 판타지 소설 구병모의 <<오토포이에시스>>부분에서는, 제가 아직 접하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평론을 읽기만 해도 감동을 얻을 수 있구나, 이렇게 접근하고 읽을 수 있구나’...작품을 평가하는 오태호 교수의 단단한 필력과 문장 흡입력이 공명이 되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사실, 구병모의 <<오토포이에시스>>는 구입해서 읽을 용기가 나지 않는,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닙니다. 하지만, ‘백지’에 써내려 가고 싶은 ‘텅 빈 충만’으로서의 ‘단 하나의 문장’을 탐색하는 작가의 결기가 들어있는 책, <<오토포이에시스>>를 평했던 오태호 교수의 문장을 읽고 작가로 살아가는 회환이 그럼에도 작가로 살아가야 하는 모순이, 글쓰기의 본질 목적이 창작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출되어 진짜 환희로 다가온다면 습관적으로 자기생성 시스템을 가동할 것이라는 결의로 바뀌었습니다.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어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도, 누군가 오태호 교수의 평론을 읽는다면, TV 프로그램에서 책을 맛깔나게 소개하는 유명한 그 누가 평가하는 책이 잘 나가듯, 그냥 믿고 읽게 될 것입니다.

감히, 평합니다. <<공명하는 마음들>>책이 평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참고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은 작가의 이면을 읽어내고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며 평가가 오히려 ‘누’가 되지 않도록 ‘단 하나의 문장’으로 흠결없이 압축했습니다. 그러므로 오태호 교수의 육체성이 ‘한계’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읽어주고 응원해 주어야 할 한 폭의 그림같은 책인 것을 공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백지’를 채워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자기 서사를 장착한 스토리텔러가 되며, 진정한 공명을 가진 위로의 책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1년 새해, 뜨거운 인터뷰를 마치며.

취재:황정미

사진:윤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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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윤례 2021-01-18 13:48:58
준비를 많이 한 인터부였네요. 오태호교수님의 책 잘 읽어 보겠습니다.

막시 2021-01-11 14:15:02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