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회담 초기 남북한 대표들의 인생유전
휴전회담 초기 남북한 대표들의 인생유전
  • 업코리아
  • 승인 2005.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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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포럼]

몇개월 전 TV와 신문에서 한국의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성우회원들이 6.25동란을 기념하여 워싱턴 한국전 참전비에 헌화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다. 나이 86세 답지 않게 늠름한 백선엽 장군의 모습도 보였다. 1951년 7월에 6.25동란 휴전협상이 시작했고  1953년 7월에 그 휴전 협상이 타결되여 휴전이 성립됐다. 협상 초기 남북대표들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 공산군측 대표: 좌로부터 시방 소장, 덩화 중장, 남일 대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의 6.25동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는 데에 불과 2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세는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역전된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이 파죽지세로 시작됐다. 이로부터 한 달 남짓 되는 10월 15일에는 백선엽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미 기갑사단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게 된다. 그로부터 불과 10여일 후 국군이 압록강 물에 손을 씻고 물을 수통에 담는가 싶더니 11월 초부터 50만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전선은 다시 37도선 아래로 내려왔다가, 38선 부근까지 올라가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의 제의로 1951년 7월 7일에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협상은 판문점에서 계속되다가 2년 후인 1953년 7월 27일 끝났다.

   
▲ 공산군측 대표: 좌로부터 시방 소장, 덩화 중장, 남일 대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휴전협상에는 유엔군측이 터너 조이 해군중장을 수석대표로 하고, 미군측 소장 3명과 국군측 백선엽 소장이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공산측에서는 북측의 남일(南日)을 수석대표로 하고 이상조(李尙朝) 소장, 장평산(張平山) 소장 외에 중공측의 장성 2명도 대표로 포함되었다. 북측의 회담대표들이 철저하게 정치군인인 반면에 유엔군측은 철저하게 직업군인이라는 점이 퍽 대조적이었다. UN군측은 나이 지긋한 반면에 남북 대표들은 모두 30대였고 그 중에서도 백선엽은 가장 나이 어린 만 31세의 청년 장군(소장)이었다.

회담장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썰렁함’ 그 자체였다. 서로 인사도 없었으며 상대방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특히 북측은 회담장을 선전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여 북한측 영역에 속했던 개성에 유엔군측이 들어가려면 유엔군측 대표들이 탄 지프차에 백기를 다는 조건을 달았고, 수행원들에게는 흰 완장을 차도록 하였다. 마치 항복문서 조인식에 들어가는 패장처럼 연출한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면 휴전과는 상관없는 소위 ‘미 제국주의에 대한 욕’을 퍼붓기 일쑤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북측은 공산측 대표들의 의자를 4 인치 높여서 위압적 자세를 연출하였고, 깃봉도 유엔군측보다 높게 다는 등, 신경전을 벌였다.

회담장에서는 수석대표만이 발언할 수 있었으므로 다른 대표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대방을 쏘아보며 기를 꺾는 것이었다. 서로 휴회 제안도 하지 않고 버티고 앉아 생리적 인내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경쟁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미국 대표나 중공 대표들은 어느 정도 여유를 부렸지만, 북한측 대표들은 시종일관 차렷 자세로 앉아 유엔군측을 쏘아보았다. 특히 백선엽과 마주앉은 이상조는 독기서린 매서운 사시로 백선엽을 쏘아보고 있었다. 파리가 이마에 붙어도 눈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테이블에 손을 얹고 쪽지에 무엇을 긁적긁적하더니 백선엽에게 돌려보였다. <상가(喪家)의 개만도 못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라는 욕이었다. 젊은 백선엽이지만 순간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선엽은 태연하게 그것을 받아 메모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상조를 다시 쏘아보았다. 이상조는 이런 백선엽에게 더욱 약이 오른 듯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결마저 거칠어졌다. 이 일화는 그 당시에 유명하였으며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54년이 지났다. 그들이 태어난 때로부터 9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들의 인생행로를 더듬어보자.

북측 수석대표 남일은 1914년생으로 소련의 타슈겐트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1942년에 소련군에 입대하여 1945년에는 소련군 대위로 북한 땅에 진주하였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소련 극동군 88여단 소속 소령으로 북한 땅에 진주한 김일성(당시 이름 김성주)과 함께 소련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북한 노동당 창설에 기여, 인민대의원이 되었다. 6.25 때에는 인민군 참모장이었다. 전후에는 정치국원까지 올랐으나, 김일성에게는 가장 믿을 만한 심복이며 동지임과 동시에 김일성 우상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하였다. 남일은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1976년에 사망으로 발표됐다.

백선엽에게 소위 <상가의 개> 쪽지를 보여줬던 북측 대표 이상조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5년생이었다. 중국 남경군관학교 출신인 그는 1945년에 입북하여 6.25 때에는 인민군 정찰국장으로 휴전협상에 참여하였는데, 회담장 안팎에서의 냉소적 어투로 또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는 돌부처로 이름이 났다. 이런 태도는 남한출신의 약점을 덮어보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1956년 당 중앙위원 후보위원에 올랐던 그는 소련의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하지만, 곧 김일성 개인숭배 운동에 반기를 들어, 본국 소환명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소환에 불응하고 소련에 망명함으로써 오늘까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 정치학 박사로 변신한 그는 1989년 2월 소련을 방문한 연세대 최평길 교수에게 김일성의 계획적 남침을 폭로하면서 증거자료들을 공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가족상봉차 서울을 방문하여 <북한은 김일성 사상으로 최면이 걸린 이상한 나라>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 때 백선엽 장군과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반갑게 만나게 되는데,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듯 백 장군이 <상가의 개> 쪽지 얘기를 했지만 이상조는 ‘잘 기억이 안난다’고 얼버무리며 멋쩍어했다.

또 한 사람의 북한측 대표 장평산, 그는 1915년 평남산으로 중공 팔로군 대대장을 지냈으며 6.25동란 시에 소위 ‘조선의용군’으로 북한에 일찌감치 들어왔지만, 곧 지휘관이 부족한 북한군에 편입되어 휴전협상 시에는 북한군 1군단 참모장이었다. 6.25 후에는 중장으로 진급되어 평양수비대 사령관이 되었고, 1957년에는 인민대의원으로까지 승승장구하는 듯하였으나,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를 비판하다가 1958년 소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쿠데타 음모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다.

한편 남측의 유일한 대표 백선엽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1920년생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해방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남으로 탈출하여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국방경비대 중위로 임관되어 국군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6.25동란 초기에는 1사단장으로 평양탈환에 앞장섰던 그는 휴전협상 시에는 1군단장이었으며, 잠시 휴전협상 대표로 있다가 곧 전선에 복귀하였고, 휴전 당시에는 이미 4성 장군으로 진급, 33세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64년 전역 후에는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의 한국 대사를 지냈으며, 교통부 장관 시절도 있었고, 성우회장도 지냈다. 86세인 지금도 여전히 반핵(反核), 반김(反金), 반공(反共) 운동에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정열을 쏟고 있다.

이렇게 북측 대표 3인 중 2명은 일찌감치 망자(亡者)가 되었고, 1명은 반김(反金)으로 돌아섰다. 남측 대표 백선엽은 여전히 반공(反共), 반김(反金)의 상징으로 건재하고 있다. 젊은 시절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3명과 말년까지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고수하고 있는 1명의 인생유전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된다.

장윤전 : 美 R & E Automotive Product, Inc. CEO

<필자소개>

1963년 고려대 화학과 졸업(56학번)/64년 도미, 美 Johns Hopkins Univ.화학과에서 수학/이후 미국 페인트산업계에서 Chemist로 오랜기간 종사/85년부터  자동차부품 수입업체 R&E Automotive Product, Inc.를 설립,운영하고 있음/이메일 : reyjchang@comcas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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