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시기에 살펴보는 교회와 예배에 대한 진지한 반성
코로나 19 시기에 살펴보는 교회와 예배에 대한 진지한 반성
  • 김영일 객원기자
  • 승인 2020.09.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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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하나님과 공동체로써의 성도가 어우러지는 어수지환(魚水之歡)의 예식이다.
비대면 예배는 성경적인 공예배라 할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아래에서 통일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아래에서 통일된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대면 예배’ 행정명령을 준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대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공동대표회장인 김태영 목사는 교회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은 포기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한다. 대통령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김태영목사에 대해 순간 대통령님과 주변인들이 겪었을 당혹스러움이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되어 지면서 기독교는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모양새다. 특별히 이러한 상황을 반정부 투쟁수단으로 삼으려한 전광훈목사측의 8.15 집회와 이로인한 코로나 19의 폭발적인 확산은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인 비방을 자초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교회를 통해 전염병이 확산되어지는 양상이 연일 보도되면서 기독교의 예배형식을 두고 교계내에서도 논쟁이 가속화 되어가는 듯하다. 즉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에 대한 신학적 고민이다. 이러한 가운데 기독교장로회(기장)측은 일찌감치 총회차원에서 정부의 방역대처에 협조하는 의미로 대면예배를 중단했으며 다른 보수교단들도 비대면 예배를 부정하는 모양새는 없어 보인다. 심지어 일부 존경받는 목사님들이나 기독교인 저명인사들도 비대면 예배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비대면 예배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목사님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되레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이 찍히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묻는다. 정말 비대면 예배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본인은 비대면 예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라 볼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할까?

1.교회가 공동체가 되기 위한 조건

교회를 구약에선 ‘카할’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회중’을 뜻한다. 신약에선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세상 가운데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의미로 성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말 교회란 말 역시 회중을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유든 교회란 ‘회중’ 즉 ‘공동체’를 의미한다.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앙하는 공동체 구성원을 집합적으로 이를 때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섭하는 자리가 예배이다. 즉 예배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공동체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엔 개인 예배와는 달리 성도와 성도사이의 연합과 일치가 요구 되어진다. 즉 단순히 예배가 아니라 조직화된 공동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어보자. 비대면 예배에서 이러한 공동체의 조직이 가능할까?  공동체의 조직은 실체와 실존이 함께해야 한다. 이러한 실체와 실존을 통해 구성원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교제는 곧 하나의 지체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는 직분이 있고, 인식이 있고, 관계가 존재한다. 즉 한 지체를 이룬다.  그런데 비대면예배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2. 형식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음과 정성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지 꼭 대면하여 예배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마 23장에서 주님은 제단과 제물중 어느것이 거룩한것이냐고 물으신다. 내용을 중시한다는 바리새인들은 제단보다도 제물을 중시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달랐다. 제단이 없는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될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물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제단이 있기 때문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예배의 형식이 없이는 불가하다. 왜냐하면 예배는 그 자체가 외적 행위로써 표현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리(禮)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대면 예배는 이것이 불가하다.

3. 정부의 행정명령은 예배를 금지 할 수 없다.

 정부는 국가의 권력을 가지고 국민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러나 그 국민의 행동을 제어하는 권한은 국민이 부여한 것이지 정부가 고유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정부의 권한은 국민 개개인간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공동체간의 계약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은 국법위에 존재한다. 그래서 종교(宗敎; 최고의 가르침)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를 국가가 행정명령을 통해 억제한다는 것은 국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제어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럼 이때 우리는 묻는다. 그렇다면 예배를 통해 전염병이 확산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일도 없지만 만일 예배를 통해 전염병이 확산 된다면 그에 대해 교회가 책임지면 될 일이다. 국법대로 교회를 폐쇄하던지 자가격리를 하던지 하면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국가가 교회의 예배에 대해 간섭해서는 안된다. 도리어 예배와 관련해서는 교계의 스스로의 결단에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것은 누구도 건드릴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예배에 관한한 교계와의 협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탄압이 된다.

4. 교계는 예배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예배와 교회에 대해서 나태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소위 개그맨같은 부흥강사들이 강단을 장악하면서 예배의 신성함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최소한의 신학적 소양도 없는 목회자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신성한 강단이 더럽혀졌다. 성장제일주의에 미친 교회들은 대형교회를 만들기에만 혈안이 되었고, 교회와 교회가 성장을 두고 경쟁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목사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덩달아 목사가 주례하는 예배나 설교의 권위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예배의 의미도 퇴색하여서 그저 설교만 들으면 되는 것이 예배인줄 착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위 온라인 예배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예배를 가져오는 듯했다. 이러한 예배의 형태는 소위 비대면예배의 전구체와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 많은 사람들도 비대면 예배가 마치 성경적으로 아무 무리가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예배란 성도의 공동체가 참 구주되신 하나님과 어우러지는 ‘어수지환(魚水之歡)이다. 그것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혼돈과 탄생이 경험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거듭나는 경험이다. 이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천국에 대한 소망 인간의 죄와 나약함에 대한 고백과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있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있다. 신앙공동체가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예배다. 그런데 이것이 비대면 예배로 가능할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5. 대면예배를 위해 작은 교회로 흩어져야....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전세계로 흩어지던 그리스도인들은 어딜가나 예배와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예배와 전도덕분에 안디옥교회와 같은 이방선교의 전초기지가 세워 질 수 있었고 교회는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정부에서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부는 그럴 권리도 없거니와 그리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정부는 예배에 대해 권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을 받을 때 교회는 기꺼이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대형교회가 성도들을 모두 수용하기가 곤란하다면 성도들을 일시적으로 작은 교회로 보내면 된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대형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는 텅텅 비어있다. 특별히 개척교회나 시골교회들은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 그곳으로 가게 하라. 만일 누군가 시골교회나 개척교회 같은 작은교회 목사님들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에 비해 지식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가기를 꺼려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걱정은 안해도 된다. 왜냐하면 예배는 단순히 설교를 듣는 시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설령 능력있는 설교를 원한다 할지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만일 당신이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전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나 목회비젼을 한번 들어보기를 권면한다. 아무리 조그마한 교회의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님에 비해 개인의 차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의 목사가 위대해 보이고 작은 교회의 목사가 능력이 없어 보이는 것은 개인의 차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의 차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흩어져 예배하게 되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작은 교회의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작은 교회의 아픔을 알게 되고 보편교회의 성도로써의 작은교회들과 일체감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그곳에서 드리는 헌금은 작은교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이후에 본교회 돌아갈때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작은교회 예배에의 참여는 단지 코로나 사태가 아닐지라도 권면해야 할 사항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좋은 기회를 버리고 예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비대면 예배를 고집하는가?

 코로나 19사태가 언제 끝날련지 난감하기만 하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람들은 거리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갈 수 는 없다. 사람은 실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는 실존이다. 비대면 예배나 혹은 예배를 쉬는 일이 잠시간은 가능할지 모르나 지속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배는 호흡과 같아서 예배하지 않으면 신자의 영이 죽기 때문이다. 비대면 예배를 말하지 말라. 대면예배를 하라. 그것이 예배이다. 장소가 비좁게 느껴지거든 주변의 텅텅 비어있는 작은 교회들로 가라. 그곳에는 당신이 예배할 자리가 얼마든지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어우러지는 어수지환의 기쁨을 만끽하라. 주님의 십자가는 그곳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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