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가의 근원(2)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일본 천황가의 근원(2)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 홍원탁
  • 승인 2003.09.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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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탁 교수의 역사산책]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보면, 하타 씨족의 선조인 궁월군이, 오오진 16년[405년]에 120개 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오오진 20년 조는, 야마토 아야 씨족의 조상인 아찌 오미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 왔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들 하타 와 야마토 아야 두 씨족은, 백제의 부(部)제도를 본 따서, 야마토 조정의 재정출납 등 온갖 행정 기능을 맡아보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야마토 왕실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815년에 완성된 신찬 성씨록에 의하면, 5세기 후반 유랴쿠 치세 때, 하타 씨족 사람 수가 (92개의 부를 구성하며) 총 18,670명에 달 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아찌 오미가 [2대왕] 사자키 에게 청하여, 아야 사람들(漢人)을 위해 이마끼 고을(今來郡)을 세웠다고 한다. 이마키 고을은 후에 타케치(타카이치) 고을(高市郡)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야마토 왕국의 중심지역 이었다.

아스까 촌주(村主), 누카타 촌주, 쿠라쓰쿠리 촌주, 하리마 촌주, 아야 촌주, 이마끼 촌주 등이 그 아야 씨족의 후예들이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아야 씨족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타케치 고을이 너무 협소해져서, 셋쯔, 아후미, 하리마 등 각 지역으로 이들을 다시 분산 배치했다고 말한다.

속일본기는 타케치 고을이, 일찍이 아찌 사주가 데리고 온 17현 사람들로 넘쳐 나서, 다른 씨족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도 안 되었다고 기록을 했다.

일본서기 유랴쿠 7년[463년] 조를 보면, 안장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비단을 짜는 사람 등이 그 해에 대거 '백제에서' 건너왔다. 이들 새로 도착한 기술자들을 오오진 때 이미 건너와 있던 (야마토 아야 씨족의)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 건너온 '이마끼' 아야(今來漢, 新漢)라 부르고, 기존 아야 씨족이 관할토록 했다.

동경대학 교수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이시다(石田英一郞: 1903-68년)는, 야마토 왕국이 한국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수립된 것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것도 자유지만, 그렇게 되면 오오진 시대에 한반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Ishida, 1974:85).

일본서기를 읽어보면,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이 아주 가까운 친족 관계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예컨대, 야마토 궁중에는 백제 왕족 가운데 누군가가 거의 항상 체류를 하고 있었다.

백제 아신왕(392-405년)의 태자인 전지는, 397년부터 405년까지, 오오진과 함께 야마토에 살았다. 그는 405년에 부왕이 서거하자 백제로 돌아와, 그 뒤를 이어 전지왕(405-420년)이 되었다. 백제 전지왕은 자신의 누이동생 신제도를 야마토에 보내, 오오진을 모시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오진의 아들 닌토쿠 치세 때의 기록을 보면, 백제 왕자 주군이 야마토 궁중에 와서, 매를 길들이고, 닌토쿠와 함께 매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백제 개로왕(455-475년) 때에는, 유랴쿠 왕에게 모니부인의 딸을 택해서 왕비 감으로 보내주었는데, 그녀가 부정한 짓을 해서 그만 화형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 곤지를 야마토 조정에 보내 유랴쿠 왕을 돕게 했다. 479년에 백제 삼근왕(477-479년)이 죽자, 이 곤지의 둘째 아들이 백제로 돌아와서 동성왕(479- 501년)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백제로 떠나는 곤지의 아들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505년, 무녕왕은 왕족 사아군을 보내 야마토 조정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597년 4월, 백제 위덕왕은 아좌 왕자를 보냈다. 일본서기는, 의자왕의 아들 풍장이 631년에 건너 왔다고 기록했다.

야마토 지배씨족 1,182개의 조상을 기록하고 있는 신찬 성씨록을 보면, 마히또(眞人)가 황족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수도지역의 마히또 씨족들을 제1권 첫머리에 수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록 내용을 검토해 보면, 모든 마히또 씨족을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간주 할 수 있다.

660년, 백제의 수도가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왜에서 돌아온 왕자 여풍장은 복신과 함께 주유성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당시 사이메이(655-661년) 여왕과 태자 텐지(662-671년)는, 큐우슈우 까지 나와서 백제 구원 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663년, 야마토 조정은 구원병 만 여명을 보냈는데, 이들 왜군은 백촌강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주유성은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은 서로들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주유가 함락 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 곳을, 어찌 다시 찾아 가 볼 수 있을 것인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상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시대 (신대) 기록을 읽어 보면, '일신(해의 신)'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나는 상권의 니니기와, 중권에서 등장하는 시조 이하레(진무)와 15대 왕 호무다(오오진), 이 세 명의 상이하게 기록된 존재가, 야마토 왕국의 실제 시조인 호무다 한 사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는, 야마토 왕국의 시조에 대한 설화적인 기록은 니니기 부분이 담당하고, 전투와 정복의 기록은 진무(이하레) 부분이 담당하고, 백제 사람들의 대규모 도래 기록은 오오진(호무다) 부분이 담당하고 있다.

홍원탁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기사 리스트
° 일본 천황가의 근원(1)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 야마토 왕국의 창건 시점 - '고대 한일관계: 쿠다라(百濟) 야마토(倭)'
° 야마토 왕국은 백제 사람들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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