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갈림길 - 이문영 교수
내 인생의 갈림길 - 이문영 교수
  • 이성헌
  • 승인 2003.09.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문영 (경기대학교 석좌교수)
주어진 글 제목 앞에 생각나는 내 인생의 갈림길은 뭐니뭐니해도 내 나이 46세 때, 그러니까 꼭 30년 전에 들어섰던 길이다. 1973년에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으며, 그 후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정도의 반복 현상이 무엇이 나에게 있었으며, 이 길이 오늘의 나와 내 나라에 무슨 교훈을 주는가를 더듬고 싶다.

1973년

1973년 봄 학기에 고려대 정문에 걸려있었던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플랜카드를 누군가가 라이타 불로 태워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런가 하면 검열을 받고 나오는 「고대신문」말고「민우지」라는 지하신문이 생겼다. 이런 짓을 하는 배후인물을 유신정부가 눈을 밝히고 찾아 다녔다. 드디어는 안기부가 이를 찾았다고 끌고 간 이가 내가 소장으로 있는 노동문제연구소의 두 직원이었다.

여름방학이 가까웠던 어떤 하루, 연구소 이사인 한 동료교수가 안기부 말이 직원 봉급을 주지 말라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형(刑)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됨으로 봉급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겁이 난 나는 이를 묻기 위하여 연구소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이사회에 이사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루는 안기부에서 출두하라고 전화가 와서 ‘남산’이라는 곳에 갔다. 왜 사상이 나쁜 사람들을 채용했느냐고 한다. 사상이 좋고 나쁨을 따지는 일은 바로 안기부가 하는 일이라고 나는 말한다. 책임을 느끼지 않느냐고 한다. 나는 도의적 책임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치로 봐서는 연구소 소장 사표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섭고 내가 무력해져 천해졌는지 나는 교수직 사표를 쓰고 나온다. 이렇게 나의 17회의 첫 연행이라는 첫 꺾임이 73년에 있었다.

나의 연표

나는 73년 이후 세 번 해직과 해직 중 5년간의 옥고를 치룬다. 두 가지 점에서 73년에 생긴 일과 유사한 경험을 이 시기에 한다. 그 하나는 내가 주장한 것이 상대방의 이성도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했던 일이다. 예를들어 내 직원에게 대법원의 판결까지는 봉급을 주겠다는 생각은 안기부가 속해 있는 유신정부의 법률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 주장을 통해서 내가 불이익을 받았던 일이다.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나의 주장과 내가 받은 불이익 면에서 열거해 본다.

75년에 월남이 패망했을 때 3개 대학에서 11명의 교수를 해직하는 조건으로 휴학을 푼다는 정부의 조치로 나는 제2차 해직이 된다. 해직 전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제2차 해직 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해직된 11명의 교수 중 3명과 이에 동조하는 문익환, 이우정 교수들과 6인 교수가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갈릴리 교회’를 만든다. 말하자면 결사의 자유라는 최소한의 요구와 제2차 해직을 나는 맞바꾸었다.

나의 제1차 옥고는 76년의 일이다. 이 때에 단 11명의 서명자밖에 얻지 못한 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해 옥고를 치른다. 이른바 ‘명동사건’인데, 이 때의 요구도 민주헌법이라는 최소한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의 제2차 옥고는 기업의 재산을 빼돌려 미국에 가버린 기업주가 버린 YH노동자들에게 일터를 주선하는 말을 정부에 해 달라고 하는 시인 고은, 문동환 등과 더불어 야당 당수의 집에 간 것이 걸려「국가보위법」위반으로 구속된 일이다. 이 경우 나의 요구는 사람에게 직장을 주라는 최소한의 것이었다.

제3차 옥고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내란을 한 것은 전두환이었으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기징역을 구형 받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법정에서 “설혹 이번에 살아서 나가면 내 본적을 광주로 옮기겠다.”고 나는 발언한다. 억울한 누명으로 죽이려는 김대중을 편드는 것이 정의라는 판단에서 였다.

나와 내 나라

우선 내 이야기이다. 내가 내쫓기지 않고 잡혀가게 되지 않은 84년 이후는 쭉 포악한 정치를 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탐구를 저술을 통하여 해왔다. 나의 자서전을 내 공부 행정학에 붙여서 쓴『자전적 행정학』(민중문학사, 1991), 관료조직의 원형을 탐구한『논어.맹자와 행정학』(나남, 1996), 민회 문화의 원형을 탐구한『인간.종교.국가-미국행정, 청교도 정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나남, 2001) 그리고 관료조직 문화와 민회문화가 공히 있는 나라만이 협력형 통치를 모색한다는 점을 밝힐, 지금 쓰고있는 책 등이 나의 최소한의 이성 탐구를 보여준다.

나의 불이익 감수에 관하여도 할 말이 좀 있다. 현민 빈소를 고려대 구내에 만들지 못한다는 나의 시위로 나는 고대에서 내쫓길뻔 했으나 간신히 내쫓기지는 않는다. 6.29 선언을 시작하게 한 고대교수의 첫 성명서를 주동했으나 잡혀가지 않는다. 나는 김영삼 단식에 동조한 5인 중 한 명이며, 나를 김대중이 가장 친한 친구로 말했으나 나는 이들에게 결코 ‘한자리’를 부탁하지 않는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써 놓고 보니 그런대로 다행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내 나라가 내가 어려웠던 때의 상황과는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어서이다. 즉 오늘은 소수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을 요구하되, 이 요구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잇속’을 챙기고 있다. 지금은 참여의 시대 라기 보다는 과다한 참여의 시대이다.

따라서 이 많은 요구는 적의 이성도 거절하지 못하는 이성에서 나오는 욕구 라기 보다는 ‘잇속’을 충족하며 우리의 감관을 만족케 하는 요구들이다. 나는 이 욕구분출을 눈앞에 놓고 과다한 민주주의로 혼란을 자초했던 소크라테스 시대의 소피스트 만능시대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믿으라는 신을 젊은이에게 믿지 않게 해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7.80년대에, 말하자면 나라 모두가 믿으라는 신, 유신헌법을 믿지 않게 하고 젊은이들을 민주주의의 신을 믿으라고 해 타락시켰던 나는 퇴직과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 사람 모두가 믿으라는 궁극적 가치를 내 나름으로는 믿지 않게 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지금 멀쩡히 살고 있으니 괴로운 일이다.


이문영 경기대학교 석좌교수

이문영 교수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경기대학교 석좌교수로 강의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