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의 때아닌 언어 논쟁,,, 위령(慰靈)인가?  추모(追慕)인가?
여수시의 때아닌 언어 논쟁,,, 위령(慰靈)인가?  추모(追慕)인가?
  • 김영일 객원기자
  • 승인 2019.04.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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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어휘는 시대를 혼돈의 시대로 만든다.

 

위령탑 네이버 제공
위령탑 (네이버 제공)

  때 아닌 칭호문제로 고운물의도시 전남여수에 작은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달 27일 시의회 임시회에서 통과한 '여수시 여수·순천 10·19사건 지역민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에서 '위령사업 시민추진위원회''위령'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임시회에서는 시민추진위원회 명칭을 두고 '추모'로 할 것인지, '위령'으로 할 것인지 임시회의에서 논쟁을 벌인결과 표결 끝에 위령사업 시민추진위원회로 결정했다.

그러자 여수시기독교단체총연합회는 지난 2일 보도자료를 내고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위령'이라는 용어는 신앙의 도리에 비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이므로 동의할 수 없다""'위령사업 시민추진위원회''지역민 추모사업 추진위원회'로 개칭할 것을 촉구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여수시 관계자는 9일 조례규칙 심의위원회를 열고 재의 요구를 할 계획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러한 기독교계의 반발에 대해 꼭 이런 것까지 종교적 교의를 적용해야 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럼 대체 위령과 추모 의 말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독교계에서는 반발을 하는 것일끼? 이것이 단지 종교적 교의 때문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이것이 반드시 종교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할지라도 엄격히 말해서 위령은 합당치 않다. 오히려 추모라는 말이 합당하다. 그럼 왜 그럴까?

첫째로 위령(慰靈) 이란 말에는 산자와 죽은자의 교섭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위령이란 말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죽은 영혼을 위로한다는 말이다. 그럼 왜 이러한 말이 나왔을까?

 우리선조들이 가졌던 우주관은 기본적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이다. 이 삼재사상에서 사람은 하늘에서 온 존재이다. 여기에서 하늘은 생명을 주는 존재요 땅은 밭이라는 음양론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에서 삶이 끝나면 육체는 흙으로, 영혼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장군은 죽어 천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모든 종교적 입장은 아니다. 불교는 끊없는 윤회를 주장하고 유교는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보듯이 죽은자의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혼은 의 형태로 소멸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관념은 죽은 자가 하늘로 돌아간다는 주장이다

한편 이렇듯 하늘로 돌아가신 분을 초청하는 것이 제사다. 때문에 제사를 통해 하늘 문이 열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와 제사상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듯 하늘로 돌아가야 할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즉 세상에서의 억울함 분노 원한을 품고 죽은자는 그 한() 때문에 하늘로 돌아가질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 남아 산자의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한맺힌 영혼들을 하늘로 돌아가도록 달래는 의식이 바로 해원제나 혹은 오구굿이다. 그리고 위령제란 바로 바로 이런 해원제나 오구굿의 다름아니다. 이것은 산자와 죽은자의 교섭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실 위령이란 용어를 쓰고 해원이나 오구굿을 한다고 해서 죽은자의 영혼과 교섭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나타난다면 소름끼치도록 두려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굳이 죽은자 와의 교섭을 전제로 하는 위령이란 용어를 쓸 이유가 없다.

둘째로 죽은자와의 교섭에는 기복신앙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위령이란 말이 옳지 않다.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이라면 우리민족은 천손사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천손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주어진 이 부단한 수련과 노력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 자기안에 내재된 신적요소를 깨우친 자가 바로 하나님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내천(人乃天)이요, 신선사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생활은 자기수련이다.

한편 이러한 수련이 없어도 신적 권능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바로 군주다. 즉 흔히 天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밀교가 들어 왔을때 밀교식으로 변형되어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되어 궁예같은 사람은 스스로 미륵을 칭하기도 했던 것이다.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고대에왕이 곧 佛(神)이다 라는 관념은 흔한 것이었다. (사진제공 네이버)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고대에 '왕이 곧 佛(神)이다' 라는 관념은 흔한 것이었다. (사진제공 네이버)

 

한편 유교에 있어서는 의 요소로 보아 인간의 에 내재된 를 성품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하늘의 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렇듯 인간이 살아 있을땐 이 되는 것이 한계가 있지만 죽은 자는 다 이 된다는 관념이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우리선조들의 하나님은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았을 땐 잘나지 못한 사람도 죽으면 이 되어 영향력의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세상에 이나 를 주는 능력을 갖게 된다. 우리선조들의 추원보본(追遠報本) 사상을 조상의 제사에 연계시킨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이것은 위령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죽은자와 교섭을 하고 위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한을 풀어 해를 끼치지 말고 복을 기원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럼 생각해보자 여순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인가?

죽은자와 교섭을 원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원한 때문에 해를 끼칠것을 두려워 해서인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위령이란 용어를 선택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럼 추모(追慕)라는 말은 어떨까?

기본적으로 추모라는 말에는 죽은자와의 교섭은 전제되어 있지 않다. 다만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젠 다신 이런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추모이다. 비록 추모라는 말 속엔 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개념이 없다할지라도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신 이런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고 다짐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위령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것은 종교가 무엇이냐를 떠나 위령이란 말보다는 추모가 옳은 것이다.

 

고대엔 산자와 죽은자 사람과 짐승 동물과 식물 생명체와 무생물 사이의 경계가 없었다. 조상들은 모든 존재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랬기에 나무에게도 기도하였고 돌멩이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그러한 시대에 만들어진 관념체계가 위령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인간의식은 날로날로 진보하였다. 우리는 이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경계선을 구분 할 줄 알며 산자와 죽은자의 세계는 교섭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것도 안다. 심지어 죽은 영혼이 인간세상에 해를 끼치거나 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안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언어 하나에서 아직도 수천년전의 고대인들의 관념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혼돈의 세계를 창출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고운물의 도시 여수에서 위령이 아닌 추모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며 진일보한 인간의식을 언어로 구체화한 합리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업코리아, UP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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