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왜곡의 시정-제10회
동아시아 역사: 왜곡의 시정-제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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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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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왕국의 형성:
백제사람들이 세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국

야마토 왕조의 성립: 모델-빌딩 (Model-Building)

1948년, 동경대의 Egami 교수는, 4세기 말 이후의 일본열도 고분 들에서 말뼈, 말 안장, 말 등자, 말 재갈 등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등, "고고학적 단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일단의 기마민족이 대륙으로 부터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는 모델을 제시 했다. 1975년, Columbia대학의 Ledyard 교수는 350-380년 기간에 해당 하는 혼란스런 일본서기의 기록을 분석한 다음, 346년에 부여가 모용선비 에게 크게 깨진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기마민족 정복자가 부여 사람들 이라는 수정 모델을 제시했다. 나는 고사기-일본서기 전편에 흐르는 기록 내용들, 특히 오오진 (호무다) 이후의 기록들에 초점을 맞추어, 4세기 말경 에 백제사람들이 일본열도에 건너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고, 천황족의 근원은 백제 왕족 이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Wontack Hong,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 일심사, 1988 (Sara M. Nelson 서평,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48, Number 2, 1989 Jonathan W. Best 서평, The Journal of Japanese Studies, Volume 16, Number 2, 1990); 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 구다라, 1994 (Sarah M. Nelson 서평,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54, Number 3, 1995 Leon Serafim 서평, Korean Studies, Volume 19, 1995); 百濟倭, 一志社, 2003; Korea and Japan in East Asian History: and A Tripolar Approach to East Asian History, 구다라, 2006 (Gina L. Barnes 서평: Korean Studies, Volume 31, 2007) 참조.

일본열도 관련기록의 공백기 (266-413)

삼국지는, 중국의 위(220-65), 오(222-80), 촉(221-63) 세 나라의 역 사를, 당대에 태어나 실제로 살았던 서진(265-420)의 진수(陳壽, 233-97)가, 왕심(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을 기본으로, 편찬한 정사이다. 그 후 430년 경, 유송(劉宋 420-479)의 배송지(裴松之c.378-445)가 추가로 상당량의 주석을 달아서 보완을 했다.

위서에 수록되어있는 동이전은 만주와 한반도의 부여, 고구려, 삼한(三韓)들 뿐 아니라, 큐슈의 왜까지 기록을 하고 있다. 특히 야마일국 (邪馬壹國) 여왕 비미호에 관해서는, 238-247년 기간에 해당하는 기록이 있어, 광개토왕 비문의 신묘년(辛卯年)조와 더불어 한일고대사를 왜곡하는 일본 사학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후한서(後漢書)에도 57년과 107년조에 왜국왕에 관한 기록이 두차례 나오지만, 범엽(范曄, 398-451)이 배송지와 비슷한 시기에 삼국보다도 앞섰던 후한(25-220)의 역사를 뒤늦게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비중이 낮게 주어진다.

위서 동이전의 왜전은 다음과 같이 시작을 한다: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살고] 있으며, 산과 섬에 의지하여 읍락국가(國 邑)를 이루고있다. 옛적에는 1백여 국이 있었으며, 한 나라 때 예방하여 배알하는 자가 있었고, 지금 사신과 통역인이 왕래하는 곳은 30여국이다."
동이전에 등장하는 야마일국 여왕 비미호가 위 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238년이었다. 비미호가 남큐슈의 구노국 왕과 싸웠다 고 말하는것은 247년이고, 그 후 어느때인가 죽었다.

三國志 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倭人…依山島爲國邑 舊 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南至邪馬壹國…其南有狗奴國 男 子爲王…無牛馬…住七八十年 倭國亂…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 道 能惑衆...景初二年 倭女王遣…等詣郡…制詔親魏倭王卑彌呼...正始八年…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相攻擊...卑彌呼以死 更立男王 國中不服...復立 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爲王 國中遂定

진서 열전은, 태시 (265-74) 초에 왜인이 조공을 했다고 기록했다.

晉書 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 倭人 泰始[265-74]初 遣使重譯入貢

일본서기 신공섭정 66 년조에 인용된 각주 내용을 보면, 동이전에서 13세 나이로 비미호의 뒤를 이었다고 말하는 일여(壹與)로 추정되는 왜 여왕이, 266년에 서진 무제 (265-90)에게 조공을 한것으로 이해된다. 攝政 六十六年 晉起居注云 武帝 泰初 二年 [266] 倭女王遣重譯貢獻
266년 이후, 진서 의회 9년 (413)조에 야마토국(倭國)이 동진의 안제에게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왜인과 관련된 기록은 중국 정사의 어느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晉書 卷十 帝紀第十 安帝義熙 九年 [413] 是歲高句麗倭國...並 自映藪� 일본서기는 “倭”혹은 “日本”이라고 한자를 쓰고 “야마토”라고 읽는다. 夜麻登 [倭] (K: 162) 日本 此云耶麻謄 (NI: 81)

야마토 왕이 남조 조정으로부터 최초로 공식 칭호를 받은 기록은 425-43년 간에야 나온다.

宋書 卷九十七 列傳 夷蠻 倭國…永初二年 [421] 詔曰倭讚萬里修貢…可賜 除授…元嘉二年 [425] 讚又遣…獻方物 讚死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 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 王…二十年 [443] 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梁書 卷五十四 列傳 東夷 晉安帝時 [396-418] 有倭王贊 贊死立弟彌

역사가들은, 266년에서 413년 까지, 일본열도에 대해 일체의 기록이 없는 이 147년간의 공백 기간이 상당한 혼란기이었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위서 왜인전에 의하면, 238-266년간에는 일본열도에 다양한 명칭 을 가진 30여개의 국읍(邑落國家)이 있었다. 그러나 413-43년간의 진서와 송서를 보면, 야마토(倭/夜麻登)국이 토산품을 보내고, 드디어 안동장군 왜 국왕의 칭호를 받는다. 큐슈의 30 여개의 국읍이 기내(畿內)의 1개로 통일 된 야마토국으로 바뀌어 중국 정사에 나타나게 만든 이 공백기가 바로 야마토 왕국의 성립 시기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한편 한반도에 관해서는, 동진의 간문제(r.371-2)가372년 6월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백제왕 근초고(r.346-75)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배했 고, 386년에 효무제(r.372- 96)가 침류왕(r.384-5) 혹은 진사왕 (r.385-92)을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배했다고 기록을 하는등, 그간 상당히 다양한 기록이 중국 정사에 나타나는 것을 볼수 있다.

晉書 卷九 帝紀 第九 簡文帝 咸安二年 [372] 春正月 百濟…王 各遣使 貢方物…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
晉書 卷九 帝紀 第九 孝武帝 太元十一年 [386] 以百濟王世子餘暉 爲使持節都督 鎭東將軍 百濟王


일본열도의 고고학적 변환기: 야요이-초기고분 (300-400)-후기고분 (400-700)

기원전 300년경, 쌀농사를 하는 한반도 남부의 변한 (주로 가야) 사람들이 좀더 따뜻하고 습한북큐슈 평야지대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본열도에서 신석기 수렵-채취 죠몽문화(繩文,10,000-300 BCE)를 이룩한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원주민들과 합류하여 야요이(彌生) 쌀농사 문화를 전개했다.

Wontack Hong, “Yayoi Wave, Kofun Wave and Timing: the Formation of Japanese People and Japanese Language,” Korean Studies, Volume 29, 2005, pp. 1-29 참조. 기원전 400년경에 전세계적으로 소 빙하기가 시작되어, 비교적 쌀쌀한 날씨가 기 원후 3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소 빙하기의 시작은, 동양에서는 호전 적 북방 유목민족과 7패(七覇)가 복격적으로 등장하는 전국시대(403-221 BCE)의 전개와 일치 하며, 서양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켈트족의 대이동과 일치한다.

600년 야요이시대(300 BCE-300 CE)는 400년 고분시대(300-700)로 이어진다.
초기 고분시대 (300-400) 분묘들은 비교적 소규모 이지만, 한반도 남부의 가야사람들이 하는식으로, 무덤들을 언덕위에, 혹은산등성이에 축조해서 아래로 논을 굽어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적은 인력을 동원해도, 얼른 보기에는 크고위압적인 인상을 주는무덤들을 만들 수 있었다.

초기 고분문화는 실용성 보다는 종교적-의식적 성격이 강했던 야요이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야요이 후기와 초기 고분시대의 문화는 연속선상에 있으며, 300년 경에 발생한 변화는 사회적 계층화(stratification)의 가속화 결과로 이해되고 있다.

초기 고분시대의 가야식 분묘 형태는, 300년경이후 한반도 남부로부터 다시한번 이주의 물결이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소 빙하기가 종결되자 전세계적으로 장기간 (300-400) 가뭄이 최고조에 달했다. Lamb (1995: 159, 161-2) 참조. 중국대륙에서는 한족 서진(265-316)왕조가 멸망하 고 5호16국의혼란기(304-439)가 시작된다. 서양에서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가 뭄으로부터 야기된 연쇄반응이, 375년 훈족의 유럽침입으로 이어져, 395년에는 로마제국이 양분되고, 476년에는 서로마제국이 소멸된다. 300년경부터 시작된 가 뭄의 악화는, 4세기 초에 한반도 남부사람들로 하여금 보다습한 일본열도에 있 는 친족들과 새삼 합류할 생각을하게 만들어 초기 고분시대를 전개시켰을수 있다.

후기 고분시대(400-700)는 평지에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로 축조 된 5세기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혹은원분(圓墳)들로 시작한다.

극심한 가뭄은, 정교한 수리시설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던 한반도 중부농경지대를 황폐화시켜, 4세기후반에와서는 백제 사람들이 서남쪽 마한지역으로 진출하고 또 일부는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여 후기고분시대를 전개시켰을수 있다.

부장품 으로는 초기 고분에서 볼수없는 각종 말 장신구, 경질 토기, 철제무기, 철제 농기구, 금동관, 금귀고리 등이 관 속, 혹은 그 주변에 매장되었다. 초기와 후기고분 유물사이에 특히눈에 뜨이는 차이점은, 말뼈와 말에관련된 다양한 도구의 출현이다. 3세기 말에 편찬된 위서 동이전은, 일본열도에 말이 없다고 기록을 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400년경에 이후에 일본열도에 말이 도래한 것이다. 중국 정사에서 일본열도 관련기록이 사라진 266-413 기간은, 일본열도 자체의 고고학적 대 변혁기이었다.

370년경, 한강유역의 백제 사람들은 한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마한을 정복했다. 직관적으로, 그 일부가 곧이어 일본열도로 건너가, 초기 고분보다 훨씬큰 5세기 무덤들을 축조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대규모 인공저수지와 U자형의 철날을 둘러 씌운 목제쟁기-삽 등을 사용했던 백제 사람들의 선진 농경기법 덕분에, 일본열도의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대량의 노동력이 논농사로부터 방출되어 거대한 5세기 고분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음 절부터 보여주는 고사기-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일본열도가 370-390년 사이에 백제사람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오오진 (호무다)이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의 시조로서 왕위에 오른것은 390 년 경이며 정복이 시작된 시점부터 정복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마구류-경질토기와 함께매장된 시점과의 사이에는 얼마간의 시차가 있었을것으로 추정한다. 야요이 600년 간, (아이누와 말라요- 폴리네시안 계통의) 죠몽 원주민과 (예맥-퉁구스 계통의) 가야 사람들이 어울려서 원(原)-일본인을 만들었다. 4세기 말, 새삼백제인 무리가 건너와 야마토왕국을 세우고, 계속해서 대규모로 도래하는 백제 사람들이 원-일 본인과 융합하여 현대일본인의 조상이된 후기고분시대 일본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야마토 왕국의 시조: 호무다 (褒武多/品陀/譽田/應神)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오오진)를 제1대가 아니라 제15대 왕 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 사학자들은 야마 토 왕국이 호무다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어째서 그들이 이렇게 생각 을 하게되었는가? 이제 잘 알려진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1873-1961) 의 학설을 소개한다.

20세기 초, 와세다 대학의 쯔다 교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 하는 호무다 이전의 왕들에 대한 기록 이라는 것은, 야마토 왕족을 태초 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 다. 쯔다의 논문이 잘 요약되어 있는 것으로 井上 等編, 日本歷史大系 1: 原始 古代 (山川 1984: 271-3) 참조.
쯔다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 기를 보면, 시조 진무 (神武) 이후 신공왕후의 남편이라는 주우아이 (仲哀) 왕까지의 (즉 2대부터 14대 왕까지의) 13명의 왕들은, 단지 죽은 다음에 만들어서 부여된 시호(和風諡號)로만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명칭들을 검토 해 보면, 전혀 각자의 고유성이 없다. 반면, 15대 왕이라는 호무다부터는, 각기 왕자 때부터 실제로 사용된 특유한 이름을 그대로 왕의 시호로 기록 했다. 오오진의 왕자 때 이름은 호무다(褒武多/品陀)이고 시호도 호무다(譽田)이다. 진무나 오오진이라는 명칭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원본에 기록 된 명칭들이 아니라, 8세기 후반에 오우미 미후네(淡海三船, 721-85)라는 학자에의해 새삼 중국식(漢風)으로 만들어 부친 시호들이다.

쯔다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와 일본 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14대 왕이라고 하는) 주우아이 왕까지의 왕위 승계 형식을 보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 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한족왕조의 전통인) 부자간의 왕위 승계란, 7세기 후반 덴지(天智, 662-71) 이후에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오진 이후 덴지 이전의 왕위 승계는, 대부분 부자간이 아니라 (투르코- 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이기도 한) 형제간의 승계이었다.
쯔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매우 설득력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천황과 천황제도는 초법적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감히 천황과 황실의 원류에 대한 정통적 서술에 의문을 제기 하는 행위는 반역죄를 범하는것과 마찬가지였다. 1940년에 쯔다의 주요 저술 네 권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1942년에는 황실의 존엄성을 훼손한 죄목으로 3개월간의 금고형을 언도 받았다.

고사기와 일본 서기를 보면, 2대 왕부터 9대 왕까지, 또 13대 왕에 관한 기록이란 것이 거의 없다. 14대 왕 주우아이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신공 왕후에 관한 내 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수의 전후세대 일본 역사학자들은, 6세기 초에 편찬된 제기(帝紀)에는 호무다로부터 게이타이(繼體)까지 12명 만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나는 야마토 왕국이 오오진(호무다)으로 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쯔다가 제시하는 근거에 추가 해서) 네 가지 더 제시하려 한다.

첫 번째의 추가 근거. 쯔다는 오오진 이전의 왕위승계가 모두 부 자간의 승계라는 특이점에 의혹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 실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왕위승계가 아주 “평화적”으로 이루어 진다 는 것이다. 오오진 이후를 보자. 오오진에서 닌토쿠(仁德)로 승계될 때, 한 바탕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닌토쿠에서 리츄우(履中)-한제이(反正) 형 제로 승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골육상쟁 유혈극이 있었다. 한제이에서 닌 교오(允恭)로 승계될 때, 유혈극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 었다. 닌교오에서 안코오(安康)-유략쿠(雄略) 형제로 승계되는 과정에서도, 또 한바탕 골육상쟁의 유혈극이 있었다. 유략쿠-세이네이(淸寧)에서 겐조오(顯宗)-닌켄(仁賢) 형제로 승계될 때에도, 또 닌켄-부레츠(武烈) 에서 게이타이로 승계될 때에도, 아주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제간의 왕위승계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왕위승계가 항상 순탄치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오오진 이후의 고사기-일본서기 기록을 현실적이 라고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의 추가 근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이라는 주 우아이가 죽었다는 200년 부터 15대 왕이라는 오오진이 즉위할때 까지 장장 70여년에 달하는 공백기간(201-69)을,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의 존재 인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다. 신공왕후는 위서 동이전에 등장 하는 왜 여왕 비미호라는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조한 가공의 인물로 간주된다. 따라서 오오진(호무다)부터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더욱 합 리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의 추가 근거. 712년에 고사기가 편찬 완료되자, 야마토 조 정은 즉시 전국에 명을 내려, 각 지방의 토산품, 특이한 동식물, 토지 비옥도, 지명의 유래, 구전돼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해 올리도록 했다. 이들 기록은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사용 되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하리마 풍토기(播磨風土記)는, 713- 715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 하리마 풍토기를 보면, 독자로 하여금 호무다가 야마토 왕국의 시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호무다는 수없이 순행과 사냥을 하고, 수많 은 지명들이 호무다의 사소한 언행들과 연관지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다른 왕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언급이 없다.

Aoki (1974: 35-39)는 “하리마 풍토기 등에는 호무다의 공격적인 품성과 전투적 인 생애에 관한 기록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호무다의 호전 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 편찬자들은,호무다가 야마토 왕국 의 지배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를 전후로한 그의 호전적 행위를 감추려고 무척이 나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편찬자들은 이미 호무다가 태어날 때 팔에 궁사(弓士)들이 사용하는 가죽 팔찌 모양의 굳은살이 있었다고 기록을 함으로서, 호무다가 강한 전투적 체질을 소유한 인물임을 암시했다. ...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호무다의 호전적인 측면에 대해 침묵을 하는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간에, 오늘날 일본열도의 25,000여 개의 하찌만 (八幡) 신사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져 오는 것은 진무가 아니라 오오진(호무다)이다.

네 번째의 추가 근거.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모든 왕들 중에 유독 공식적 시조인 진무와 15대 왕이라는 오오진(호무다)만이 큐슈에서 태어 났다고 기록을 했다. 진무는 황족의 조상신인 천손 니니기(邇邇藝)가 하늘 에서 내려온 다음 얼마 후에, 또 오오진은 모친(신공왕후)이 한국으로부 터 배를 타고와서 큐슈에 상륙한 직후에, 각기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것 이다. 진무는 큐슈에서 동정(東征)의 위업을 이루는 장도에 오르는데, 갓난 아기 호무다는 큐슈로부터 모친(신공)과 함께 축소판의 동정을 수행한다. 공식적 시조인 진무와 15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무다(오오진)만이, 오 로지 야마토지역의 무뢰한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큐슈에서 태어났다는 기 록은, 이 두 개의 존재가 바로 야마토 왕국의 시조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天照大神之子…娶高皇産靈尊之女 (N1: 135) 而生…次生…瓊瓊杵…及至奉降 (N1: 161)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穂槵�之峯 (N1: 149) 後遊幸海濱 見一美人 (N1: 155) 於是…邇邇藝…於…遇麗美人…所生之子…次生子…弟火遠理…海神之女…見感目合而…卽今婚其女…於是海神之女…乃生置其御子而…是…日子…娶其姨…生御子名五瀨…次…次…次若御毛沼…亦名神倭伊波禮 (K: 130-146)
整軍雙船 度幸…新羅之國…其政未竟之間 其懷妊産 卽爲鎭御腹取石以纏於裳之腰而 渡筑紫國 其御子阿禮坐 (K: 230- 232)

야마토 왕국의 창건 년도: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야마토 왕국이 기원전 660년에 수립 되었다고 기록을하고 있지만, 일본의 극우 사학자들 조차도 이를 믿지 않는다. 이는 곧 야마토 왕국이 도대체 언제 세워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 한다.

일본서기 461년조의 무녕왕 출생기록 내용은 무녕왕능 지석에 기 록된 내용과 일치 한다. 461년을 기점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도들이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660년부터 461년 사이의 기간 중 특이하게도 375-405년의 30년 기간만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 확히 120년(2周甲)의 괴리를 유지한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한반도 관련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연도를 맞추어 보면, 이 시기의 일본서기 (한반도 관련) 기록들이 정확하게 120년 끌어 올려 졌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이 “2주갑 괴리”라는 것은, 일본 사학자들도 인정을 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신공왕후 섭정 55년에 (즉 일본서기가 255년으로 설 정한 해에) 백제의 초고왕(근초고왕)이 죽고, 그 다음 해에 왕자 귀수 (근구수)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죽은 해가 바로 375년이다. 섭정 65년조는, 백제 침류왕이 죽자 어린 왕자 아화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탈취했다고 기록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 면 그 해가 바로 265년이 아니라 385년이다. 일직이 아스톤(N1: 256)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바로 이와같은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근거로 역산을 해서, 당시 일본서기의 내용이 실제보다 120년이나 앞으로 당겨져 서 기록된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내용이 일치할 경우, 삼국사기쪽의 년도가 분명한데다 믿을수 있을것 같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일본서기는 호무다(오오진)의 즉위 원년이 270년이라 한다. 그런데 백제의 전지 (直支) 왕자가 오오진 8년, 즉 277에 야마토 조정에 온 것 으로 기록을 했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자가 야마토 조정에 보내진 것이 397 년이라고 기록을하고 있다. 또 일본서기는 백제 아신(阿花) 왕이 오오진 16년(285)에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삼국사기는 405 년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면, 호무다가 왕위에 오른 즉위 원년은, 270년이 아니라, 39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應神 八年 百濟記云 阿花王立…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NI: 367) 十六年 百濟阿花王薨 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NI: 373)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三 阿莘王 六年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 腆或云直支…六年出質於倭國…十四年王薨…國人…迎腆(S2: 45-6)


120년괴리: 가공의 신공왕후 존재를 통해 비미호를 호무다에 연결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서 영감 을 얻어, 신공왕후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가공의 여인은 고사기-일본서기가 야마토 왕국의 15대 왕이라고 기록 을 한 호무다를 낳은 바로 다음해인 201년부터 269년까지 섭정을 했다.

息長帶比賣命 生御子…大鞆奕ⓜ� 亦名品陀和氣命 (K: 226)
神功 攝政前紀 (仲哀 九年十二月)…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攝政 元年 …是年也 太歲辛巳 卽爲攝政元年 (NI: 349); 六十九年…皇太后崩…時年一百 歲…是年也 太歲己丑 (NI: 361)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정확히 100살을 살고 269년에 죽 었다니, 170년에 출생을 한 셈이다. 일본서기는, 이 허구의 존재가 마치 (247년 이후 언제인가 죽었다는) 왜의 여왕 비미호와 시대적으로 일치하 는 것처럼 위장을 했다.
일본서기는 신공왕후라는 존재가 섭정을 했다는 기간 중, 섭정 39년, 40년, 43년 조에, 위서 동이전의 239년, 240년, 243년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각각 인용해 놓았다. 일본서기는 또, 신공 섭정 66년이라는 특정 연도를 중국 서진의 무제 태초(태시) 2년, 즉 266년인 것으로 기록을 했다.

神功 攝政三十九年 魏志云 明帝 景初三年 倭女王遣…(NI: 351); 四十年 魏志云 正始元年 遣…等 (NI: 351); 四十三年 魏志云 正始四年 倭王復 遣使大夫…(NI: 353); 五十五年 百濟肖古王薨 五十六年 百濟王子貴須立爲王 六十四年 百濟國貴須王薨 王子枕流王立爲王 六十五年 百濟國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일본서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야마토 왕국의 시조) 호무다가 신 공왕후의 아들이라는 구도를 만들었다. 신공왕후가 201년 10월에 섭정을 시작했는데, 호무다를 그 바로 전해 12월에 낳았다고 하니, 호무다의 출생 년도는 200년이다. “69년 간”의 섭정을 마치고 죽은 다음 해에 호무다가 왕위에 올랐다하니 71살에 왕이된 셈이다.

일본서기는 위서 동이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신공왕후의 섭정시 작 년도를 비미호의 기록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신공 왕 후의 서거년도와 (바로 그 다음 해라는) 호무다의 즉위 년도와의 연결 작 업은 한반도와 관련된 기록을 가지고 시도를 했다. 하지만 390년에 왕위 에 오른 호무다와 연결을 하려면 신공왕후가 389년까지 무려 189년간 섭정을 한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하긴 실제로 일본서기가 수록한 내용을 보면, 신공왕후라는 가공의 존재는 비미호와는 달리 주로 4세기 중엽을 무대로 활약을 하는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산술적으로 일관성이 있게 기록을 하려면, 예컨대 신공왕후 섭정 64년에 백제 근구수왕이 죽고 왕자 침류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을 하지 말고, 120년을 더해, 섭정 184년 조라는 것을 만들어 기록을 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침류왕의 서거를 기록한 섭정 65년 조는, 섭정 185년 조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식 으로 삼국사기의 년대와 일치시켰다면, 섭정 최종 년도는 섭정 69년이 아니라, 120년을 더한, 섭정 189년이 되고, 호무다가 왕위에 오른 해는 390년이 될 수 있으며, 일본서기에서 461년 조 까지 계속되는 기록 년도 상의 엄청난 혼란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섭정 66년[386년]이라는 해부터 일본서기의 기록을 거꾸로 읽어 가보면, 이런저런 기록들이 섭정 39년[359년]까지는 꾸준히 이어진다. 이 기간 중에 종잡 을수 없이 소개되는 한반도와 관련된 기록들은, 해당 년도는 엉뚱하지만, 내용 자체는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것 같다. 그런데, 섭정 39년 조를 마치 고는 별안간 섭정 13년으로 26년을 뛰고, 또 곧바로 섭정 5년으로 8년을 뛴다. 이 뛰는 장소가 바로 비미호라는 3세기 존재를 무지막지하게 4세기 무대로 연결시 키기 위해, 비미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허구의 존재인 신공왕후의 섭정기간을, 수록 할만한 내용도 없으면서, 어거지로 늘여보려는 작업이 시도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신공왕후라는 존재의 역할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도, 애당초 너무나 황당한 거짓말을 하려니, 논리적인 일관성을 따지기가 민망했던것 같다.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조작을 했지만, 후세의 독자들이 아주 쉽게 그 허 구적인 측면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배려를 해 주었다고도 생각을 할 수 있다. 즉, 의도적으로, 정확한 기록을 생명으로하는 사관(史官)을 가 장하는 완전범죄 시도를 애당초 포기해 버린 것이다. 또, 후세의 독자가 쉽게 진실을 추적할 수 있게,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구체적인 단서를 흘려 놓았던 것이다.
예컨대 신공왕후 기록은, 마치 꿈 얘기나 하는 듯, 그녀의 신라 정 벌 이야기를 소개한다. 말인즉, 배를 타고 큐슈를 출발한 신공왕후 일행 이, 키를 잡거나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신라 땅에 들이닥쳐서, 곧바로 신라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가장 흥미있는 대목은, 그녀가 신라를 정벌하러 한국 땅에 가 있는 동안 출산 시기를 맞게 되는데,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일본 땅에서 낳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허리춤에 돌 을 매다는 신비한 방법으로 출산을 지연시킨다. 한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북 큐슈에 상륙한 다음, 그녀는 드디어 호무다를 낳게 된다.

神功 攝政前紀 九月...適當皇后之開胎 皇后卽取石揷腰 而祈之曰 事竟 還日産於玆土...冬十月…津發之…卽大風順吹…不勞櫨..新羅王...降於王船之前 (NI: 337-339) 皇后從新羅還之 十二月 生譽田天皇於筑紫 (NI: 341)

즉, 호무다는 원래 한국 땅에서 낳을 것인데, 큐슈에서 낳도록 조치를 했다는 얘기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소위 “천황”들 중에, 이렇게 특이 하게 출생을 했다는 존재는 호무다(오오진) 이외에 단 한명도 없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한국 땅에서의 야마토 왕국 창건자의 탄생을, 일본 땅에서의 탄생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후세의 독자들에게 (신공왕후라는 가공의 인물에 대한 기록을 빌어) 이렇게 완곡한 방법으로 전달하기로 결정을 했던것 같다.

신공왕후 일행이 벌리는 진짜 전투는 한반도에서가 아니라, 호무다를 낳은 날로 부터 2개월이 지난 다음, 일본열도에서 벌어진다. 신공왕후가 신생아 호무다(오오 진)를 데리고 수행한 전투는, 큐슈로부터 동정 (東征) 길에 오른 진무가 벌린 전투 의 축소판이다. 진무의 본격적인 동정이나, 신공왕후의 축소판 전투는 모두가 다, 1대 진무에서 시작해 15대 오오진으로 끝을 맺는 고사기 중권(人代)에 포함된 기 록들이다. 고사기의 구조는 오히려 단순하다. 상권(神代)은 건국 신화이고, 중권을 압축시키면 야마토 왕국의 시조 한사람의 얘기가 되고, 하권은 2대(16) 닌토쿠 (仁 德) 왕부터 19대(33) 스이코 (推古 b.554 r.592-628) 여왕까지의 기록이 된다.

천황가의 유래를 감추고, 야마토 왕조를 아득한 태고적부터 내 려오는 토착왕조로 만들기 위해, 야마토 조정은 712년에 고사기를, 720년 에 일본서기를 편찬 완료했다. 백제는 이미 663년에, 당나라 힘을 빌린 신라에 의해 소멸되었다. 백제계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외세를 불러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불구대천 원수의나라 신라를, 꿈속에 서나마 누군가가 정복을 해 주어야만 했다. 또, 야마토 왕국의 시조가 (일본 열도가 아니라) 한국 땅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떤 형식으로든 후세에 전해야만 했다. 신공왕후라는 가공의 존재는, 바로 이 숨겨진 목적을 위해, 비미호를 바탕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다.

일본서기는, 69년간에 걸쳐 섭정을 하던 신공왕후가 기축년(己丑, 269년) 4월에 100살의 나이로 사망을한 다음, 그녀의 아들 호무다가 7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를 270년의 경인년(庚寅年)으로 기록을 해 놓고있다. 우리가 추정하는 실제의 390년 경인년과는 정확하게 120년의 차이가 나도록 했다. 그래도 일본 서기가 호무다 즉위 년도를 “경인년” 이라고 단서를 제공해 준것은, 후세 독자 들로 하여금 실제 즉위년도를 쉽게 추정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유독 정복왕조 수립을 전후한 30년 기간(375-405)만 정확히 120년이라는 괴리를 유지해 준것 자체가 특별 배려로 간주할수 있다.


고사기-일본서기가 제공하는 정복 시기와 과정에 관한 단서들

정복 초기단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일직이 Aston은, 일본서기의 246-265 (즉366-385) 기간 중의 기록 도 사실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었다. Aston (1896/1972: 253, 346)
즉, 375-405 기간 중의 120년 교정 방법을 앞으로 9년 더 연장을 해, 366-374년 간의 기록도 해당 연도를 추정하고 그 내용을 검토 해 볼 가치가 있는것이다.

366년(246년)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가야연맹의 일원인 탁순국의 왕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지난 364년 어느 날, 구저, 미주류, 막고라는 이름의 백제 사람 3인이 우리 나라에 와서, ‘동방에 귀한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제 왕[근초고]께서 신들을 귀국 조정에 보냈습니다. 그러하오니 우리가 그곳으로 갈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 요. 우리가 그곳에 도달할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 임금님께서 틀림없이 후한 사례를 할것입니다’ 라고 말을 하기에, 나[탁순 왕]는 구저 일행에게, ‘나도 바다 건너 동쪽에 귀한 나라 가 있다는 말을 들어왔소만, 우리는 아직 그 나라와 직접적인 왕래가 없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을 정확히 모르오. 아무튼 우리와 그 나라 사이 에는 험한 파도가 치는 넓은 바다가 있기 때문에, 큰 배를 가지고도 건너 가기가 힘들것이요. 그러니, 설령 그곳으로 오가는 나루터가 있다고 한들, 배도 준비를 안하고 어떻게 갈 작정이요?’라고 말을 해 주었소. 그러자 구저 일행은, ‘그렇다면 당분간은 그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겠습니다. 돌아가서 선박을 확보할 방도를 마련한 다음, 차후에 시도를 해 보겠 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소.”

神功 攝政卌뿍� 百濟肖古王…曰…不知道路 有志無從…卓淳王末錦旱岐…曰 甲子年七月中 百濟人…三人 到於我土曰 百濟王聞東方有日本…而遣臣等…故求道路…曰 本聞東有貴國…唯海遠浪嶮…僅可得通…久氐筑�…不若更環之備船舶 以後通矣 (NI: 353)

독자는 일본서기의 이 기록으로부터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 가? 364년 당시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고, 마한은 한반도의 서남부를 아 직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가는 길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야마토 왕국의 창건자 호무다가, 한 무리의 백제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백제 왕실이 정보를 수집 하기위해 탐색대를 남쪽 탁순국으로 보냈던 364년으로부터 그리 먼 훗날 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 장군”들이 이끄는 야마토 군사에 의한 대규모 한반도 침공얘기다. 일본서기에 의하 면, 369년에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에 파병을 한것이 바로 신공왕 후라는 것이다. 말인즉, 야마토 군대가 탁순에 도착했을 때, 그들 군대 규모가 너무 적다는 것을 깨닫고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으며, 얼마 후, 분명히 백제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신라를 정복하고, 탁순을 비롯해 6개의 나라를 평정한다. 여기서 그들 군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방 야만족을 정복 하고, 그 정복한 땅들을 모두 백제에게 하사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백제 의 근초고왕과 태자 수”가 합류를 하고, 또 4개의 지역이 제물에 함락 된다는 얘기다.

神功 攝政卌爀� 以…爲將軍 則與久氐� 共…至卓淳國…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更復奉上 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擊…而破之 因以平定…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屠南蠻…以賜百濟 於是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及…木羅斤資等共會…相見欣感 厚禮送遣之…與百濟王…登辟ⓢX精�…而送之 (NI: 355-357)

만약 독자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 군사적 활약을 당시 일본열 도의 왜인들 작품으로 이해한다면, 목라근자 같은 백제장수들이 왜군을 거느리고 다니는것을 이해할 길이 없을것이다. Ledyard(1975)가 지적한 바와 같이, 왜군이 차후에 그들이 정복했다는 지역을 어떻게 먼저 통과 해 탁순에 도달을 했다는 것인지, 또 왜군이 어떻게 북쪽으로부터 남쪽 으로 내려가면서 정복을 했다는것인지를 이해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독자가 일단 이 모든 군사 행동을 백제 사람들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상당히 일관성이 있는 얘기가 된다.
근초고왕이 남쪽 탁순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366년에 해당하는 삼 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단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밖에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군대가 남진을 했었을 369년조를 보면, 근초고왕 이 한강 남쪽에서 황색 깃발을 날리며 대규모 열병을 했다는 기록밖에 없다. 하지만 온조왕 6-9년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는 기록이 나온다. Ledyard는 이들 기록이 360년 (6周甲) 뒤로 물려져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병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한다. 삼국사기 하 (1983: 22) 미주 26 참조.
6주갑을 조정하면 366년이 되는 삼국사기의 기원후 6년 조를 보면,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백제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땅을 떼어주어 안거케 해 주었는데, 이제 나라가 완전하고 백성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 하여, 우리 땅을 침범 한다"고 질책하는 기사가 나온다. 367년이 되는 7년 조를 보면, 백제왕이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품게 된다 는 기사가 나오고 368년이 되는 8년 10월 조를 보면, 백제왕이 마한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기사가 나오고 369년이 되는 9년 조를 보면, 마한의 나머지 지역도 모두 병합하는 기사가 나온다.

三國史記 卷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近肖古王 二十一年 [366] 遣使聘新羅 二十三年 [368] 遣使新羅送良馬二匹 二十四年 [369] 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一 溫祚王 二十四年 [6/366]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二十五年 [7/367] 王聞…遂有幷呑辰馬之心 二十六年 [8/368] 王曰 馬韓漸弱…儻不如先人而取之 十月 王…潛襲馬韓 遂幷其民邑 唯…二城 固守不下 二十七年 [9/369] 四月 二城降…馬韓遂滅

Ledyard는,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기록을 검토 한 다음, 일본서기 에 기록된 당시 모든 얘기가 실제로 있었던 백제 군대의 남방 진출에 대 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바로 이 단계에서 Ledyard는 전혀 불필요한 오류를 범해, 백제왕과 그 일 행을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깨진) 부여의 전사들이라 부른다.
일본서기의 얘기는 백제왕과 일본열도를 향해 떠나는 야마토 군대의 지휘자가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일본열도로 향해 출발하는 야마토 군사를 (백제왕족의 일원인) 호무다가 이끄는 일단의 백제 전사들로 이해하면 모든 기록 내용이 일관성을 가지게 되고, 정복 초기단계 상황를 구체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천손의 본향: 부여-고구려-백제 건국신화와 야마토 왕국의 건국신화
고사기-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대(神代)에 지상왕국의 시조로 등장 하는 천손(天孫) 니니기는, 하늘나라에서 곧장긴키(近畿)의 야마토 (倭) 지 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큐슈로 강림을 한다. 시조가 「큐슈로 내려 온다」는 것은야마토 왕국이 토착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가 서술하는 인대(人代) 건국시조의 영웅 적 동정(東征) 무용담 역시 야마토 왕국이 정복왕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의하면, 니니기가 하늘에서 큐슈의 구지봉 (槵 정상으로 내려온 직후, “이곳은 한국을 마주 바라본다(向韓國)”라고 말한다. 에가미(1964: 55-6)는, 건국신화 첫머리에서 한국(韓國)이 거론된다는 사실은, 천손들의 본향이 한국임을 뜻한 다고 말한다.

故爾詔…日子…邇邇藝…天降坐于竺紫日向之高千穗之久士布流多氣 (K: 128)
天神之子 則當到筑紫曰日向高千穗槵비炘� (NI:149)
於是 詔之 此地者向韓國…故此地甚吉地 (K: 128)
고사기를 영어로 번역한 Chamberlain(1882/1982: 137-8)은, 에도(江戶) 후기국 학파(國學派)의 거장인 모도오리(本居宣長, 1730-1801)가 고사기를 (가나로) 번역 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표현을 삭제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모도오리가 내용을 변조하려한 이유는 오로지 전통적인 신대 설화에서 한국이 적대적이 아닌 형태로 거론된다는 사실을 엄폐 하고 싶다는 분명한 이유에서 이었다. 자신이 논평- 해설을 한다는 원문을 그렇게 부정직하게 처리한 행위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라고말한다.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야마토 왕국의 건국설화는 그 핵심적인 주 제(motives)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하늘나라에서 천신 혹은 일신 (日神)의 아들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되지 않은 장소로) 내려오고, 그 땅의 토착 통치자는 자리를 피해준다. 이 천제(天帝) 혹은 천신의 아들 은 물의 신, 즉 하신(河神) 혹은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 다. 천제의 아들 혹은 천손이, 명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내려(降)와 지상의 세계를 다니다가, (물의 딸인) 미인을 만나고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정말 로 신의 아들인가 시험을 받은 다음 그녀와 결혼을하게 된다는 대목에 서는, 양쪽의 표현 기법까지도 똑같다. 그런데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은, 완전히 인간화된 아들을 낳은 다음,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한다. 건국시조를 낳는 역사적인 역할이 끝나면, 이들 남녀가 각기 제고 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숙명 역시 똑같은 구도인 것이다. 그들의 로맨스 는 인간세계 왕국의 시조를 낳아주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여기까지 가 신대에 속하는 신화가 된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아들과 물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이(혹은 그의 아들)가 자라나서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장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이 부분이, 완전히 인간화 된, 인대(人代)의 전설이 된다. 인간세계의 시조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명된 장소로 가 는 도중에, 거북들 혹은 거북을 탄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설화의 끝부분 을 보면,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는 백제의 전설과도 일치한다. 즉, 형 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에 실패를 하고, 동생이 성공을 한다는 공통주제를 발견한다. 백제의 건국설화를 보면, 형 비류는 해변가로 가서 실패를 하지 만, 동생 온조는 내륙 산악주변에 정착을 해, 새 왕국을 세우는데 성공한 다. 고사기-일본서기에서는 진무의 할아버지가 둘째 아들인데 산과 잘 어 울리고, 그 형은 물과 잘 어울리는데 결국 실패해 동생에게 신속(臣屬)을 하게 된다. 진무 자신도 아래 동생이고, 형은 동정 중 첫 번째 육지 전투 에서 전사한다.

호무다 (오오진) 역시 두 번째 아들이고, 그 형에 대해서는 고사기-일본서기에 단 한줄의 기록도 없다. 백제 건국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후에 고사기-일본서기의 건국설화를 쓴 사람들에게 추가 적인 영감의 출처가 되었을 수 있다. 부여-고구려와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한 건국설화가 (고구려에서 유래한) 백제사람들을 통해 일본열도로 도입되어, 최소의 수정을 가한 후, 야마토 왕국의 건국설화가 된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의 즉위 9년이 되는 해에, 전연(前燕) 모 용황(慕容皝은 신성(新城)까지 쳐들어 왔었고, 342년에는 환도성까지 침 입하여 미천왕의 능을 파서 시체를 싣고 왕비, 왕모를 포함해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고 한다. 미천왕은 일직이 313년에 낙랑군을 축출 해버린 고구려 15대 왕이다. 당시 고구려는 요동을 병합한 선비족 모용씨 의 팽창으로 심각한 시련기에 처해있었다. 반면 백제의 근초고왕은 369년 경에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371년 에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광개토대왕(391-412)이 출현하기 이전의 4세기는, 백제가 이웃 국가들과의 무력 충돌에서 지속적 으로 공세를 취한 시기였다. 백제의 군사력과 영토확장이 최고조에 달했 던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375-84) 재위 시기가,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을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운다는 모델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고대 한일관계 왜곡의 핵심

야마토 왕조를 수립한 일본 천황가의 근원을 어디서 찾을것인가? 도대체 야마토 왕국은 어떻게 창건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듣고싶어하는 내용의 해답이 있다. 우선 “일본인”이란 이 세상의 어느 민족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민족”인데, 야마토 왕국 은, “수천년에 걸친, 점진적인 정치적-사회적 발전단계”를 거쳐 “자연발생 적으로 형성된,” “순수한 토착 지배세력”인 천황가 선조들의 노력으로, 야 마토지역을 본거지로해서 성립된,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얘기다.

수많은 일본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과거에도 또 바로 이 순간에도, 이 모범답안을 다양한 형태로 포장해서 일본국민에게 제공을 해오고있다. 예컨대 전후 일본 고고학자들은, 위서 동이전의 야마일국(邪馬壹國)을 후한서의 야마대국(邪馬臺國)으로 대체한 다음, 야마대국이 큐슈가 아니라 기내(畿內)의 야마토 (夜麻登/耶麻謄) 왕국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고, 고분시대 자체를 300-700년에서 200-700년으로 끌어올려, 동이전의 비미호 (히미꼬) 활동시기를 고분시대와 연결시키고 있다. Barnes (2007a: 9, 18, 103, 195) 참조.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고전적 경제법칙의 위력을 실감할수 있다.

흔히들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무엇을 어떻게 왜곡했는지 모르고 있다. 중국-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준 모델을 가지고 아무리 사료를 들여다 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분석의 틀을 가지고 사료를 접근해야 왜곡을 근본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것이다.

홍원탁(洪元卓)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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