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1904 - 1989) - '분단 이데올로기로 상처입은 예술혼' (1)
이응노(1904 - 1989) - '분단 이데올로기로 상처입은 예술혼' (1)
  • 관리자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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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우리 시대의 절실한 의문 중의 하나는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분단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일지 모른다.

예술가 이응노는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해 피해를 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북 분단은 우리 중의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양 체제는 예술마저 그 지배 영역 아래 두려했다. 그러나 예술은 이데올로기 체제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초극하고자 하는 사람을 분단체제는 용인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양 편이 공히 자기 편에 묶어 두려는 힘의 논리를 구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응노는 분단체제의 피해자다.

아니 어쩌면 남북 문화 자체가 분단 이데올로기에 칭칭 동여 묶여진 구금된 피해자일지 모른다. 이응노 예술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를 단순히 동·서양 예술의 형식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말 자체가 '공상가(Visionaries)' 또는 '망상가(Daydreamer)'라는 의미의 가치절하적 어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주장하는 과학성에도 불구하고, 그 속성은 여전히 관념적이고 직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Marx)와 엥겔스(Engels) 또한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았다. 즉 이데올로기란 그릇된 사상구조로서 계급의 입장을 대변하여, 계급 자체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하부구조의 반영일 수밖에 없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의 일부인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의 귀결일지 모른다.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토피아(Utopia)는 현실과 반대되는 대비의 이상개념이지만, 이데올로기는 현실개혁 및 현상타파를 그 본령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관념이나 이상향으로 옆에 비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려고 한다. 사실 이데올로기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때문에 이데올로기에는 감정이 실리고, 신화와의 동일성을 시도하며, 행동요구적일뿐만 아니라 대중 동원과 조작, 그리고 통제까지도 서슴없이 시도하려 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란 '동원의 신념구조(Mobilized Belief System)'라 불려지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예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음악과 미술의 경우처럼 예술은 감정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치는 예술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시키려 한다. 때론 예술과 정치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합일할 수 없는 본질적 속성을 지닌다.

이데올로기는 자기 구속적이지만, 예술은 궁극적으로 자유를 갈구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예술을 규제하려 할 때 그것은 일시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데올로기가 정치 지배집단의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예술을 규제하려고 할 때, 이는 예술가에게 때로 엄청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마치 잘못 쓰여진 칼처럼 말이다.


정치의 예술 지배

우리의 근대 문화는 어떻게 보면 정치 군림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근대사의 대부분이 자의적 선택에 의해 형성되었기보다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정치상황 아래서 정치란 문화의 한 부분이거나 서로 보완적으로 공존할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때로 상충하는 면이 더 많았다.

일제 식민지 아래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에도 이같이 타의화된 문화의 파행은 계속되었다. 양분된 강토에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 그리고 상이한 이념문화가 밀려들었다. 북쪽의 문화는 사회주의 이름 아래 체제 강화의 문화조달에 분주하였고, 남에서는 자본주의의 상업문화나 관 주도적 문화가 보편화되었다.

남과 북은 하나같이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양편의 지배집단은 지배기간의 공고화를 최우선 과제로 하여 문화의 정체 예속화를 서슴지 않았다. 그같은 양단 아래서 중도나 온건논리는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자기 편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북쪽의 처지에서는 남로당이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남쪽에서는 반공이념에 배치되는 모든 주장은 '빨갱이'로 몰아 붙였다. 이같은 무서운 이분법적 단순논리가 정치지배논리의 확장이나 공고화를 위해 동원되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했다.

다시 말해 체제논리가 반대세력 제거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살벌한 권력의 횡포 속에 다양한 의견과 가치를 가진 문화가 온전히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6·25의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은 모든 다양한 문화요소의 뿌리를 깡그리 뽑아버렸다. 전쟁이 파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현상의 단일화 내지 획일화였다. 마치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은 다 초토화시켜버리고 오직 한 종류의 나무만을 심는 인공조림의 현장 같은 것이었다.

북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 Realism)과 개인 숭배의 강화로 모든 문화의 방향이 집결되는 듯했다. 남에서는 자본주의 모순의 산물인 광고문화, 감각문화, 개인소비의 문화, 모더니즘이란 이름의 미술양식이 군림하였다.

그래서 부르크하르트(Burckhardt)가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권력국가를 '그 자체가 악'이라고 보았던 것은 때로 권력이 순수한 인간의 창출력을 억압적으로 제압하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 필자 이석우는 중학 시절 추상미술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며 불운한 아픔의 작가였던 양수아 선생의 문하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서양사학을 전공하여 역사학도의 길을 가게된 뒤에도 그는 역사를 통하여 축적되어온 예술과 문화유산이 역동적인 인간정신의 가장 소중한 자기표현임을 믿고 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영국왕립 역사학회 해외펠로우, 옥스퍼드 대학 중세사학회 회원이다. 저서로는 「아우구스티누스」, 「세계의 역사와 문화」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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